문화도시부평 참여자가 말하는 5년의 이야기 그 두번째 문화두레시민회 박일용, 권순금, 김가람
안녕하세요. 여러분, 문화도시부평입니다. 제가 파리 여행 중에 몽마르뜨에서 '사랑해 벽'이라는 걸 보게되었어요. 250개의 언어로 311개의 '사랑해'라는 단어가 가득 적혀있었어요. 한국인으로서 한글 '사랑해' 앞에서 사진도 찍고 감격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번에 문화도시부평 <시민 공론장>을 준비하면서 문화두레시민운영회와 함께 '부평해'벽을 만들었어요! 3년 간 문화도시부평의 다양한 행사에서 시민 여러분의 글귀를 모았었는데요. 이 벽을 준비하면서 각자가 감각하는 부평에 대해 알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왜 부평하십니까? 오늘은 부평을 사랑하는 세 분을 모셨습니다. 바로 문화두레시민운영회 박일용님 그리고 부평구문화재단 장선미 시민연대팀장과 김가람 담당자입니다. 문화두레시민회 활동을 하며 수많은 이름들이 떠오릅니다. <문화두레시민회> 첫 번째 담당자였던 방은정 대리님. 두 번째 담당자였던 노수진 대리님. 이 두 분의 노고에도 큰 박수를 보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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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어떻게 문화도시부평을 만나게 되셨나요?
일용 2021년 <꽤 쓸모있는 도시실험>을 보며 문화도시부평과 인연이 되었어요. 부평에 관심이 아주 많아 법정 문화도시에 선정됐다는 사실은 금방 알았고요. 본격적으로 문화도시부평 사업에 참여한 계기는 아마도 <문화두레시민회>와 <새봄> 아닐까 싶어요. 성과공유회<새봄>때 무대에 올랐거든요. 그 과정을 계기로 함께했던 분들과 인연을 맺기도하고, 이렇게 문화두레시민운영회 활동도 하게 되었어요.
가람 이전 직장을 그만두고, 개인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게 있었어요. 한 1년 가까이 부모님 일을 도우며, 백수아닌 백수 생활을 하다가 20대가 끝나가는 거예요. 안되겠다 싶어서 구직을 시작했는데, 제가 사는 동네에서 무슨 '문화도시' 사업을 한다는 공고를 봤어요. 그래서 면접을 보고 부평구문화재단에 입사하게 되었어요.
선미 문화도시센터에는 2024년 1월에 발령받아 왔어요. 재단 내에서도 문화도시센터로의 이동은 상당히 긴장되었던 기억이 나네요. 센터에 와서야 그야말로 문화도시부평이라는 말이 제대로 실감이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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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시부평 5년,
당신에게 어떤 변화나 성장을 가져다 주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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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 제 개인적인 이야기도 좋지만, 토착민으로서 얘기를 하고 싶어요. 부평은 분명 나라의 성장에서 산업적이든 문화적이든 어떤 역할을 했던 도시였습니다. 1899년 경인선이 뚫렸던 곳이기도하고, 대중음악의 태동을 이끈 캠프마켓이 있던 도시이기도 해요. 그렇지만 그건 옛날 이야기이고, 지금 세대들은 이런 역사가 있었을까,라고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 과정에서 문화도시가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뮤직 플로우 페스티벌>, <부평사운드>, <도시, 음악을 기록하다> 등 다양한 음악사업으로 음악이 찬란했던 순간을 기억하기도 했고요. <문화 1호선> 사업으로 역사를 다루기도 했고요. 그런 자긍심이 생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이 활동을하며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게 많아지다보니깐 공부를 하게 되었어요. 굴포천의 역사나 부평의 역사에 대해서요. 특히 지역에 이주민이 많아, 그런 분들께 얘기를 하려다보면 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어요. 문화 스위치가 켜졌다고 생각합니다! 문화도시 사업 뿐아니라 부평구와 관련된 봉사단도 운영하고 있어요. 제 꿈은 부평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되는 거예요.
가람 예비 사업 때 시민기획단<부평뮤즈>나 영상 크리에이터를 모집해서 활동했던 기억이 너무 좋았어요. 코로나 시기, 사람을 만나면 안되면서도 기어코 만나야했던 그 시절이 향수처럼 남아있어요. 힘든 일을 함께 겪어내면 친구가 되곤 하잖아요. 제게는 그 시기가 그랬습니다. 나고자란 고향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연대감을 주었던 것 같아요.
문화도시 사업은 제게 일자리를 제공해준 고마운 사업이면서도, 동시에 평생의 반려자를 만날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앞서 말했던 면접 때 옆에 앉아 함께 떨던 친구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했거든요. 6년 가까운시간 30대가 되었고, 가장이 되었어요. 제가 사는 부평이 문화도시로 성장하는 걸 지켜보면서, 동시에 제 개인의 변화도 체감했던 순간들이었어요.
선미 그야말로 부평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었어요. 부평을 들여다보며 사람을 만나는 일. 사람을 연결해서 부평을 보는 것, 그게 제겐 문화도시부평이었어요. 이 사업 안에서 혼자 하는 일은 없더라고요. 결과가 어떻든 끝까지 손잡고 가야 하는 일이죠.
이번 시민공론장에서 느꼈던 떨림은 5년의 시간을 통과해 골인 지점에 서있는 기분이었던 것 같아요. 백 명이 넘는 시민들과 문화도시부평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그 자리가 성사된 것만으로도 벅찼죠. 물론 아직 저희에겐 마지막 연도 평가가 남아있지만요. 저를 포함해 그 안에 모였던 모두가 문화도시부평 아래 성장한 시민이란 걸 느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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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만의 고유한 문화 정체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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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 문화정체성은 음악도시, 역사도시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문화도시 지정 이후에 시민들의 문화 인식 개선이 많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부평아트센터가 생기고 좋은 영향이 부평에도 많아지지 않았나 싶어요.
가람 브런치에서 그런 글을 봤어요. 부평사람들은 남들이 부평 욕하는 건 싫어하고, 자기는 부평 욕을 많이 하는 게 특성이래요. 가만 들어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합니다. 기묘한 애향심이 부평 사람 DNA가 있다고 봐요. 역사와 관련된 건 많은 시민이 알지 못해 아쉬움이 있어요. 저 역시도 부평에 살면서 부평이 음악도시란 건 일하면서 알게되었어요. 막상 그 사실을 알고보니, 수많은 역사, 수많은 사업이 있었어요. 그 역사를 지키기 위해 많은 분이 노력하시는 모습도 보고요. 한국 최초의 천일염전도 부평에 있었다고 하고요. 부평사람들이 도시를 사랑하는 만큼, 그 도시가 어떤 도시인지 제대로 발견해주길 바라고 있어요.
선미 부평의 특성에 대해 이야기하면 문화다양성이라는 말이 늘 포함돼요. 그 안에 특히 이주민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요. 엄연히 따지면 저도 이주민이에요. 인천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거든요. 그런 저도 인천으로 이주해 와서 부평에서 문화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으니, 융합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이런 다양한 사람이 상생하는 점이 조화롭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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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시 사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나
프로젝트는 무엇이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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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 <꽤 쓸모있는 도시실험> 외에도 정말 많은 문화도시 사업에 참여했어요. 저는 그 중 2023년에 영도로 갔던 <도시라솔여행>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문화도시라는 사업 자체를 '부평구'에서 진행하는 것만 보다가, 이렇게 많은 도시가 문화도시를 참여한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배울점이 많았어요. 전국문화도시박람회를 함께 갔던 경험은 많은 부평구민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2024년 운영회에서 기획했던 <도시라솔여행 부평별곳>편도 기억나요. 기획도하고 조장으로 운영까지 하니 감회가 달랐습니다. 마지막 펍캠프마켓에서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서 즐겁게 이야기까지 나눴어요!
가람 저도 <도시라솔여행>도 기억에 남지만, 지금 이렇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간이 제일 기억에 남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3년간 문화두레시민회 사업 실무자로 너무 많은 시민 분들을 만났어요. 운좋게 <시민 공론장>, <시민 간담회> 등으로 한 해 마무리 인사를 드린 거 같아서 2025년 연말이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선미 아무래도 사무실이 주된 업무 장소이다보니 밖으로 나가는 순간이 기억에 남아서.. 모두 동일한 답을 내게 되네요. 저도 <도시라솔여행>이요. 물고기가 물 속에 머무르다 수면 위로 올라가 숨 쉬듯 다녀온 여행 같은 업무였죠. 특히 청주에 갔을 때 날씨와 어우러져 한껏 여유가 느껴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 외에 부평풍물대축제와 함께 진행한 <부평생활문화축제>에서 더위와 추위를 넘나들던 고된 추억도 떠오르네요. <전국문화도시박람회>도요. 모든 축제가 문화도시 사업의 집합체와 같아서 그런 장소에서는 벅참을 느끼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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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부평이
어떤 문화도시로 이어지길 바라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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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 주철민님이 따뜻한 공기를 만들어야 한다했는데, 공감해요. 공기를 만들기 위해 문화도시 속에서 엔지니어라고 해야할 까요? 그런 사람들이 조금 더 노력하면 좋은데, 마무리되어가는 거 같아서 아쉬운 마음이 커요. 그러면서도 누군가 해줘야하는 일을 해주셨다는 것에 감사함도 큽니다. 주민자치회, 협동조합이 이제 지역에서 안정화가 되는 거 같아요. 그 시간이 참 오래 걸렸습니다. 문화도시도 내년부터 안정화가 되는 과정이길 바라겠습니다.
가람 오래 곁에 있는 것들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풍물대축제도 30년간 이뤄졌고, 저희 부평구문화재단도 곧 20주년이라고 합니다. 어릴 때는 새로운 걸 찾았는데, 이제는 오래하는 모든 것들에 경외심을 갖게 됩니다. 윤성희 작가의 단편소설 <여름방학> 중에 '병자'라는 주인공은 이름을 바꾸려고 하는데요. 냉장고에 포스트잇으로 후보 10개를 붙여놓고 여닫으면서 달리기를 잘할 것 같은 이름은 끝까지 붙어 있을 거라고 하는 장면이 있어요. 저는 모든 포스트잇이 다 떨어지고 남는 단어가 '부평'이었으면 좋겠어요. 가장 달리기를 잘하고, 가장 건강한 도시가 되길 바랍니다. 고려시대부터 600년 넘게 지킨 그 이름처럼 끈질기게 문화로운 도시가 될 것 같습니다.
선미 가람대리님 이야기를 들으며 경주 생각이 났어요. 문화로 성대했던 고대도시 경주처럼 문화!하면 현재 가장 성대한 현대 문화도시로 부평이 떠오르길 바랍니다. 100명의 시민이 모두 문화도시부평을 이야기했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누가 뭐래도 우리는 문화도시가 맞아요. 이제 그것을 지속하는 단계가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서동요처럼 우리는 문화도시야~라고 서로에게 지속적으로 전해주는 거죠. 우리 모두가 문화도시임을 자부하며 여느 작은 식탁 위에서도 문화도시부평의 이야기가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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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사회적협동조합 빠띠와 함께 문화도시부평 5년의 목소리를 모으고 있어요. 문화도시부평과 함께했던 모든 분들 좋은 글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벌써 100명이 넘는 시민, 예술가, 기획자, 문화공간 운영자, 직원 분들이 작성해주셨는데요. 뭔가 각자 문화도시부평에 대한 애틋함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고 있어요. 위 링크를 눌러서 다양한 분들의 이야기 확인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문화두레시민회 관련 사업을 함께한 세 분을 모셔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시간이란건 되돌아보면 항상 짧은 것 같습니다. 이 찰나의 시간을 함께해주시는 문화도시부평 모든 시민, 관계자 여러분 행복하세요. 계속해서 인터뷰로 찾아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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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레터는 여기까지
발행인 (재)인천광역시부평구문화재단 대표이사 이찬영
편집인 (재)인천광역시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센터장 최인호
총 괄 (재)인천광역시부평구문화재단 시민연대팀장 장선미
기 획
- 문화두레시민운영회(최종희, 주철민, 권순금, 서선미, 박일용)
- (재)인천광역시부평구문화재단 시민연대팀원 김가람
오늘의 뉴스레터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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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천광역시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센터발신자 garamkim@bpcf.or.kr주소 인천광역시 부평구 아트센터로 168 전화번호 032-500-2156수신거부 Unsubscrib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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